티스토리 뷰

‘버려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tvN 인기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가 주려는 교훈이다. 집에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비우면서 내 욕망도 비울 수 있다니, 당장 정리를 시작하고 싶다. 

그런데 욕망을 버리려고 물건까지 버려야 할까. 2021년 진짜 신박한 정리를 제안한다. ‘마인드 미니멀리즘’이다. 나를 파괴하는 욕망, 욕구, 습관, 집착 따위는 2020년에 묻어두자. 기자들도 소소한 실천을 해봤다. 육식, 플라스틱 빨대, 하루 한 잔의 술, 게임 현질(아이템을 돈 주고 사는 것), 배달음식을 버렸다. 정말로 버리니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버리는 것은 끝없는 투쟁이라는 사실. _편집자주 


2000년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14살 장혜영은 경기도 여주 집을 떠나 할아버지 집이 있는 수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부모님은 어디 가고 애 혼자 전학 수속을 하러 왔니?” 부모의 부재 속에 홀로 전학 수속을 밟던 중학생에게 향한 말이다. 2020년 정의당 국회의원이 된 장혜영은 ‘어떤 어린이를 만나도 부모님 이야기만큼은 쉽게 꺼내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글을 접하곤 20년 전 자신이 들었던 야속했던 그 말을 떠올렸다. 그의 기억을 소환한 건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 참여자가 쓴 글이다. 

2020년 6월29일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한 장혜영 의원은 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11월2일 작가 14명과 함께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한때 사용했지만 이제는 윤리적인 이유로 쓰지 않는 말과 표현을 모으는 작업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누군가에겐 일상적 배제와 차별의 말이기도 하다. ‘부모님’이란 말도 그렇다. 

장 의원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차별하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작가들의 경험담을 나누면 일상에서의 차별을 성찰하도록 요청하는 차별금지법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한 프로젝트에 시민들 참여가 더해져 12월14일까지 모두 46개의 글이 모였다. 쓰기 전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말들을 정리해본다. 

# 질병·장애인 비하 
병신 암 걸리겠다 정병(정신병) 선택 장애 발암 축구… 
10여 년 동안 ‘아픈 나’를 긍정하기 위해 분투한 조한진희(활동명 ‘반다’)씨는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아픈 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우리 사회를 되짚는다. 이러한 차별은 말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병신(病身)’이라는 표현이 그렇다. 병신은 곧 ‘병든 몸’이다. 이러한 뜻을 그대로 쓴다면 현대인 다수는 병신이다. 그러나 질병이 있거나 장애가 있는 몸을 비하하는 데 사용된다. 

질병을 희화화하는 또 다른 표현은 ‘난독증 있냐?’ ‘암 걸리겠다’ ‘지랄병 도졌네!’ 등이 있다. ‘긍정적이네. 아픈 사람 같지 않아’ 같은 말은 아픈 몸을 부정하고 극복해야 하는 상태로 여기게 한다. ‘건강은 선(善), 질병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생각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야’ 같은 무시무시한 말로 이어진다.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에 참여한 카피라이터 출신 김하나 작가는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책 소개를 접하곤 “머릿속에서 뭔가 파샤샥 깨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나는 내 말이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배제하지 않도록 꽤 열심히 노력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남아 있다. 말은 생물이어서 말과 말을 둘러싼 맥락은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 변화할 것이고 나는 힘닿는 한 업데이트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난치의 상상력> 저자 안희제 작가는 ‘병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다 ‘거지 같다’는 혐오표현을 쓴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가난과 빈곤은 공적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인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일면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자리를 잃고 배제당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을 고작 나의 기분을 드러내려고 사용한다는 건 얼마나 무지하고 당혹스러운 일인가.” 

# 나이 차별
○린이 철없다 초딩 같다 사춘기냐?…
어린이에서 따온 ‘○린이’는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해 서투른 사람을 뜻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주린이(주식)·등린이(등산)·수린이(수영)·요린이(요리)·캠린이(캠핑) 등.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공동저자 황선우 작가는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즐겨 쓴 ‘수린이’라는 말을 이제 쓰지 않는다. “내가 이 말을 쓰지 않기로 한 건 어린이를 성적 대상으로 지칭하는 끔찍한 단어와 비슷한 방식의 조어법이라는 걸 알고 나서다.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고 나니, 서투르고 잘 못하는 초심자의 의미로 어린이를 불러오는 일의 부적절함도 깨닫게 됐다.”

따지고 보면, 정확하지도 않은 표현이었다. “나보다 수영을 훨씬 잘하는 어린이도 세상에 아주 많을 테니까. 그리고 실제 서툴다고 해도 아이들이 성장하며 뭔가를 배워가는 건 당연한 일이며,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건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어린이는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이다. 나이가 어려도 존중하자는 말이, 되레 나이 어린 사람을 낮추는 표현에 활용되는 셈이다.

#성차별·이성애 중심주의
여자애/남자애가~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해 여배우 여자/남자친구 있어?…
김혼비 작가(<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프로젝트 참여 글에서 외할머니 대신 ‘모계 쪽 할머니’라는 표현을 썼다. 어머니 쪽은 바깥을 뜻하는 ‘외-’를 붙이고, 아버지 쪽은 가까움을 뜻하는 ‘친-’을 써서 구분하는 호칭을 쓰지 않기 위해서다. ‘남녀노소’처럼 남자가 맨 앞에 오는 단어들이 지겨워 굳이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과 남성들’이라고 풀어쓴다.

중학교 교사 장의훈씨는 교사가 사용하는 언어에 여전히 성 고정관념에 기반한 말이 넘쳐난다고 했다. 여자애가 왜 그렇게 목소리가 크냐/나대냐/조신하질 못하냐…. 남자애가 왜 그렇게 소심하냐/용기가 없냐….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인간적 특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긍정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성 발달의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민감해지고, 기꺼이 더 불편해져야 한다.”

다른 표현을 모르면 차라리 입 닫기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에 대해 지나친 검열 아니냐며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장혜영 의원은 “어떤 말을 세상에서 없애버리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누군가는 문제없다고 여기는 말을 누군가는 어떤 경험을 계기로 더는 쓰지 않게 됐다는 이야기를 한번 보고,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장 의원에게도 버리고 싶은 말이 있을까? 수도권 중심주의가 담긴 ‘서울 올라간다’는 표현이 그중 하나라고 했다. “그 말을 했을 때 ‘왜 꼭 올라가는 거야?’ 반문한 친구가 있었다. ‘어, 그렇지. 서울 그냥 가려고, 북쪽으로 가려고…’ 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미쳤다’는 말도 쓰지 않으려 애쓴다. “발달장애인 가족이 있고 정신장애인 친구들도 있기 때문에 ‘저 사람 미쳤나봐’라는 말을 들을 때 ‘미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표현만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럴 땐 차라리 입을 닫는다.”


from. 한겨레21. 박현정기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