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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기억을 버리거나 덮지 않고 꼭 쥔 채 어른이 되고 마흔이 된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손에서 놓았다면 나는 결국 지금보다 스스로를 더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삶의 그늘과 그 밖을 구분할 힘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현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상처를 앓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안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 그렇게 일렁이는 말들이 마음의 안팎으로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오후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제야 찾아드는 텅 빈 평안이야말로 대상을 지정할 필요도 없는,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 산문집을 묶고 나서 내 글에 엄마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세상의 이 말들을 쥘 수 있게 해준 엄마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내게 말을 가르쳐준 사람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 요즘 나는 내 글을 읽는 당신이 무엇보다 안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이 글들이 불러일으킬 당신의 어떤 기억과 마음으로부터도. 


:: 엄마는 엄마를 잃었지만 그렇게 울다가도 순식간에 다시 엄마의 모습으로 돌아가 우리가 피곤하지 않은지, 뭐 필요한 게 없는지를 살폈다. 


:: 유이책보예용
유감을 표시하고 왜 그랬는지
이유를 말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보상을 하고
예방을 약속하고
용서를 구한다. 


:: 아마도 자라 자신은 감각하지 못할 밀쳐냄의 순간을. 어린 나에게 수십 년 동안 유지해야할 애완은 너무 무겁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건 마치 영원-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드는 아득함이나 두려움과 같았다. 


:: 하지만 세상에 나온 그때부터 지금까지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기도를 해온 이모로 돌아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이 들어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이모가 되겠다고 적어 보냈다. 그 말 뒤에 준이는 시크한 십대답게 짧은 인사도 없이 대화를 끝냈을 뿐이지만, 나는 그것이 준이에게 한 말이므로 가장 지키고 싶은 다짐이 되었다. 


::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라고 항의하기 위해 타이밍을 살펴야 하는 상황은 한국에서 이렇게 잦고 불시에 등장한다. 


::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예단하지 않고, 내가 여기까지 해주겠다 미리 선 긋지 않는 선의. 그러한 선의가 필요한 순간 자연스럽게 배어나올 수 있는 것. 그것은 얼마나 당연하면서도 소중한가. 이러니 매 순간 배워나갈 수밖에 없다.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곁에 있다는 것에 다행스러워하면서. 그런 마음들을 기꺼이 배우겠다 다짐해보면서. 


::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가능하면 글로 기록해두기 위해 모든 것을 붙들고 싶지만 만나지 않는 밤이 되자 잊어-버렸다. 다만 어떤 길을 걸을 때면 거기에 예민한 촉수들이 달려있는 듯 풍경들이 흔들리면서 무언가를 환기시킨다. 
... 그것이 내면의 어떤 것을 건드려 '위협'할 때, 위협은 공포와 분노와 절박감과 동시에 아주 맹렬한 생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니까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간과 풍경이 나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내 마음에 기록하였는가, 혹은 기록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 조카가 그렇게 들을 수 있었던 데는 진심이 잘 전달되도록 표현한 선생님의 능력이 있었겠지만 아무리 그렇게 표현해도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타인의 선의를 듣고 신뢰할 수 있는 힘, 우리에게도 분명 있었을 그 힘을 우리는 언제부터 잃어버리고 만 걸까. 


:: 어느것 기성세대가 된 나는 그런 개인의 그릇된 선택에는 자기 자신의 맹신과 무지가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구조를 따지지 않고 개인들만 비난하고 더 나아가 '혐오'한다면, 그 또한 공동체의 맹목과 무지일 거였다. 


:: 엄마이고 지금도 당당히 엄마이지만 그렇게 불러줄 아이가 옆에 없기에 끊임없이 슬픔을 갱신하며 세상과 싸워야 하는 엄마. 


:: 어떤 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고 누군가의 얼굴은 흐릿하게 지워짐으로써 더 정확히 지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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