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멈춰선/책

시절일기. 김연수. 2.

_sran 2019. 11. 4. 23:05


: 다행히 나는 나를 이해시키는 게 어려운 만큼 타인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데 걸리는 이 지체의 시간이 나는 좋다. 

: 새삼 내가 하는 이곳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이곳에서 나는 영주하는 자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
지구와 태양이 있는 한 아침 햇살은 영원히 반복되겠지만, 나는 곧 사라진다. 이 시간적 대비가 영원히 반복될 아침 햇살을 순간적으로 아름답게 만든다. 
.
"내 삶은 실수의 백과사전이었어요. 실수의 박물관이었죠"
.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이나,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가 여기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채 날고 있는 중이라는, 택시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실제로 우주 속을 날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
"랍비님 가구가 없네요." "당신 가구도 없네요." "저야 잠시 들렀으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 속의 랍비처럼 사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 우리는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이라는 배역을 연기하고 있다. 
.
제2의 천성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제3의 천성도 가능하다. 그리고 제3의 천성이 가능하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
가능하면 멋진 배역을 맡기를. 

: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는 문장은

: 겐코는 "세속적인 일에는 아무 미련이 없으나 그날그날 하늘을 보면서 느꼈던 감명 깊었던 순간들만은 마음에 남아서 지워지지 않는다."

; "취향으로 인한 시행착오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족함은 항상 '할 수 있음'의 차원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부족함이다. 취향이 부족한 사람은 무언가를 멀리하지 못한다."

: 사랑이 막 끝났을 때였다. 지훈도 그 고양이처럼 어둠 속에서 겁에 질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먹이를 내미는 119 대원도,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초등학생들도 없었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갈 수 있는 예전의 나 같은 건 없다는 걸, 지훈은 그때 깨달았다. 애당초 원해서 빠진게 아니었기 때문에 원한다고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
하지만 이제 지훈은 리나가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문이 열린다 해도 그 비밀번호가 진짜 비밀번호가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옛날이야기, 모두 옛날이야기...... 꽃이 지는 건 꽃철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이 끝나는 건, 이제 두 사람 중 누구도 용기를 내지 않기 때문에. 
 한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듣고 기억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명이나 될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