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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선/책

시절일기. 김연수. 1.

_sran 2019. 11. 2. 20:16


: 시는 형편없었지만, 시를 쓰는 나는 근사했다. 

: '나는 악에 대해 잘 알지만 오직 선한 것만 봅니다.' 이런 할머니들이 있어 나는 또다시 장래를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장래희망은, 다시 할머니, 웃는 눈으로 선한 것만 보는 할머니가 됐다. 

: 가족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 가장 친밀한 동시에 가장 오해하기 쉬운 관계니까. 

: 학교에서 광주항쟁 사진전이 열렸다. 그때 나는 그 사진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니 그 앞에 서기도 전에 그럴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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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망설이게 한 건 어느 틈엔가 내 마음에 생긴 검은 그림자였다. 이 그림자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죄책감일 수도 있고, 인간에 대한 연민일 수도, 감정이입에 따른 개인적인 슬픔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저런 생각들도 다 시간이 지난 뒤에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검은 그림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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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불길들은 의미화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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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큰 불길이라서 생긴 그림자다. 당연히 그 불길을 지켜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기지 않는다. 더 많이, 더 오래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에 더 크고 더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 재능은 데뷔할 때만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체력이 필요할 뿐이다. 

: 그 누구도 신이 될 필요는 없다. 단 한 번만 이라도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 넌 지금 여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일들을 경험할거야. 잊지 못할 정도로 행복한 순간도 있겠지만,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도 있을 거야. 그 어떤 경우라도 이게 너의 여행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어. 그게 바로 서울의 일시적 거주자에게 남산타워가 전하는 말이었다. 

: 그때는 청춘의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는 무조건 좋아지리라 믿었다. 

: 거울 속에 늙은 얼굴이 있다고 해서 그 거울이 그를 늙게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세계는 그 거울과 같다. 세계는 늘 그대로 거기 있다. 나빠지는 게 있다면 그 세계에 비친 나의 모습일 것이다. 

: 이러한 사용을 불러오는 감각 경험이 익숙하고 '옳게 느껴지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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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용법을 모를 뿐아니라 잘못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은 옳다고 느끼며 계속 연습하는 일이 그렇다. 이런건 선생이 교정해주기 전까지는 고칠 수가 없다. 고집스런 둔재의 불행, 어쩌면 인간 모두의 불행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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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옳다는 느낌에서 벗어나는 일, 알렉산더 테크닉의 용어로는 'undoing'이다. 이건 '함을 하지 않음'으로 번역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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