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에 등장하는 가족은 평온해 보입니다. 모처럼 아들과 딸이 부모님 댁에 찾아와 한 상에 둘러 앉은 채 모두들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즐겁게 먹습니다.
그들이 모인 이유가 십여년 전 바다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고나서 익사한 장남의 기일을 지키기 위해서임을 관객이 눈치채고 난 후에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선 십여년 전에 잃은 가족 구성원을 떠올리면서 누군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 한 번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잘 극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긴, 벌써 십여년이나 지났으니까요.
자상한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러스한 말투로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넘나들지요. 무뚝뚝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까지 보이고요.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요. 식탁에 둘러앉아 별별 시시한 이야기를 다 꺼내도록 장남에 대해선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 이유가 세월이 어느새 아픔을 치유해줬기 때문일까요.
시간이 흐르면 고통이 점차 약화되면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몸 속 깊은 곳에 잠복해 있던 어떤 상처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드러나 잊은 듯 했던 통증을 고스란히 되살립니다.
인간은 결국 다른 사람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서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는 존재이지요. 영국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는 “나는 내 가족의 역사를 영화로 만든다. 만일 고통이 없다면 내 영화도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뮤지션 스팅은 “나는 고통과 혼란에 처해 있을 때 뛰어난 음악을 만들어낸다”고 회고한 바 있지요.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고 누군가는 음악을 만듭니다. 누군가는 괴로울 때 그런 음악을 듣거나 그런 영화를 보며 펑펑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지만 또 누군가는 그저 입술만 깨뭅니다.
‘걸어도 걸어도’의 아버지는 자신의 장남이 구해낸 아이인 요시오가 별 볼 일 없는 직업을 가진 청년이 된 모습을 보고서 “저런 하찮은 놈 때문에 내 아들이 죽다니. 저런 놈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라고 버럭 역정을 내며 뒷말을 합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요시오에게 친절히 대합니다. 그러나 준페이의 기일마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찾아와야 하는 요시오에 대해 “이제 저 사람은 그만 불러요. 유족인 우리를 보면서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불쌍해요”라고 말하는 차남에게, 어머니는 “바로 그래서 부르는 거야”라고 속내를 드러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초래한 사람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차갑게 벌을 주고 있었던 거지요.
이 영화의 아버지는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가 죽은 바다로 내려갑니다. 이 영화의 어머니는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가 묻힌 산으로 올라갑니다. 바다로 내려가는 사람이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보다 덜 아파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은밀하게 복수를 하는 이가 직설적으로 욕을 내뱉는 이보다 더 잘 견뎌내고 있는 거라고 할 수도 없지요.
고통을 견디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표출되는 양상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거나 덜 느낀다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그만큼의 약함과 그만큼의 악함으로 악착같이 견딥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from. blog.naver.com/lifeisntcool/220486417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