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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무라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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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영감은 대부분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뇌의 준비운동 시간에 많이 온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시합전에 몸을 푸는 것 같다. 음악의 경우에는 다른 뮤지션의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를 뒤져보거나 할 때, 너무 잘된 것을 만났을 때 자극이 되어 활성화되기도 하고, 오히려 기가 꺾이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별로인 것 앞에선 용기가 솟아올라 호랑이 기운으로 작업에 임하게 되기도 한다. 실제로 별로라기보다 내가 멋대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만.
음악의 경우엔 조금 요령이 있다. 십 년 동안 나라는 선수를 굴리는 방법은 조금은 터득했다. 가끔은 혹독하게. 가끔은 너그럽게. 하지만 하루종일 글을 쓰는 사람으로 지내면서 나는 생초보가 되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냥 열심히 하고, 쉴 때 잘 쉬고, 다시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 하지만 우리가 머리로 아는 것을 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체지방 십이 퍼센트, 엑스스몰 사이즈를 입는 네개 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되었겠지. 그렇지 못한 나는 엔진이 후진 자동차처럼 자꾸 시동이 꺼졌다. 그럴 때마다 막막한 마음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어라라,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의 책에 힌트가 상당히 많은 것이다.
우선 그의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의 서문을 읽고 나는 녹다운이 되었다. 이 책의 1부에서 전하고 싶었던 말의 거의 전부가 단 몇 페이지에 적혀 있었다. 그것도 서문에! 청춘이 끝나고 마흔이라는 나이를 앞에 두고 느끼는 복잡한 마음, 그래서 외국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그것을 어디선가 울린 먼 북소리라고 표현한 것, 간단치 않은 이야기를 간단하게, 그리고 명료하고 솔직하고 깊고 설득력 있게 척척척, 잘도 적어두었더라.
이 책을 처음 읽은 고등학교 이학년 때 이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외국 나가서 살 고 싶었다는 말을 왜 이렇게 비장하게 오버스럽게 해? 하고 생각하고 여행기치곤 지루하고 별 재미없네, 하면서 책장을 팔랑팔랑 넘겼던 것 같다. 당시 읽고 있었던 무라카미 류 소설의 주인공들은 콘돔에 코카인을 넣어 삼키고 비행기의 이코노미석에서 메슥거림을 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쪽이 훨씬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입안이 쓰게 느껴질 정도로 절절히 공감을 했다. 고작 서문에 말이다. 그리고 본문은 위로의 연속이었다. 과거의 나를 허락받은 기분이었고, 현재의 나를 위로받은 기분이었고, 미래의 내가 겪을 막막함을 미리 건네받은 기분이었다. 만천팔백 원, 오백 페이지짜리 책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받았다.
하지만 그다음 읽은 <무라카미 라디오>, 젊은 여성들이 주로 보는 패션지 <앙앙>에 연재되던 탓인지 ‘종잇장처럼 가벼워, 하지만 그래서 나는 진정 멋진 아저씨지’하는 미스터 무라카미의 쿨병이 페이지마다 퍼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에 공감할 리 없는 사람들은 깊이가 없다며 흥! 무시할 것이고 사실 나도 읽으면서 콧김이 몇 번 나왔다. 그래 이거였지. 내가 발견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약점. 이 아저씨에게 존경하는 작가의 훈장을 달아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유.
갑자기 고백을 하나 하겠다. 어릴 때의 나는 박수를 짝! 치며 책을 내려놓았던 적이 몇 번 있다. 저자가 약점을 드러내는 순간에 왠지 이죽거리며 웃게 되는 것이었다. 너도 완벽하진 않구나? 하고/ 자신의 감정에 지나치게 빠져 있다거나, 합리화를 한다거나, 인간적으로 얄미워 보인다거나, 그런 낌새를 채면 그 순간 무언가를 증명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렇게 부끄러운 얘기를 하다니, 이 사람은 이런 점이 별로군 (그리고 그걸 잡아낸 나는 별로가 아니군) 하며 짝, 하고 손바닥을 치고 약간의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다. 나 자신이 현무암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방에 틀어박혀 일 년간 같은 부분을 고치고 새로 쓰고를 반복하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파스타를 삶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자주, 자세하게 말하는 것은, 거기서 왠지 희미한 잘난 척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난처한 문제에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얄미운 아저씨의 말투를 쓰는 것은, 혹시 긴 인생, 무지막지하게 무서운 창작의 바다에서 휩쓸려 내려가지 않으려는 작은 몸부림이 아닐까. 그런 잔재미로 잠시 숨을 쉬고 다시 묵묵히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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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익숙한 새벽 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