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김연수. 2.
: 다행히 나는 나를 이해시키는 게 어려운 만큼 타인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데 걸리는 이 지체의 시간이 나는 좋다. : 새삼 내가 하는 이곳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이곳에서 나는 영주하는 자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 지구와 태양이 있는 한 아침 햇살은 영원히 반복되겠지만, 나는 곧 사라진다. 이 시간적 대비가 영원히 반복될 아침 햇살을 순간적으로 아름답게 만든다. . "내 삶은 실수의 백과사전이었어요. 실수의 박물관이었죠" .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이나,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
멈춰선/책 2019. 11. 4. 23:05
시절일기. 김연수. 1.
: 시는 형편없었지만, 시를 쓰는 나는 근사했다. : '나는 악에 대해 잘 알지만 오직 선한 것만 봅니다.' 이런 할머니들이 있어 나는 또다시 장래를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장래희망은, 다시 할머니, 웃는 눈으로 선한 것만 보는 할머니가 됐다. : 가족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 가장 친밀한 동시에 가장 오해하기 쉬운 관계니까. : 학교에서 광주항쟁 사진전이 열렸다. 그때 나는 그 사진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니 그 앞에 서기도 전에 그럴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 나를 망설이게 한 건 어느 틈엔가 내 마음에 생긴 검은 그림자였다. 이 그림자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죄책감일 수도 있고, 인간에 대한 연민일 수도, 감정이입에 따른 개인적인 슬픔일 수도 있었지만..
멈춰선/책 2019. 11. 2. 20:16
소설가의일. 김연수
--- 그러므로 현대 소설의 주인공이 온몸으로 끌어안아야만 하는것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이 불안이다. 만약 [춘향전]처럼 만난 첫날에 사랑가 부르며 여주인공 옷고름 푸는, 참으로 명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원망해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보다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소설은 없다. 설사 그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고 해도 불안 속에서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주인공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에 그런 주인공에게 우리의 마음이 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하..
멈춰선/책 2016. 8. 7. 1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