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의 약함과 악함. 이동진.
이번 주에 다시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 GV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세번째로 이 작품을 보게 되었는데,역시나 가슴 속이 꽉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네요. 최근 1~2달 동안 무려 세 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가 개봉-재개봉되었는데, 이 기회에 '걸어도 걸어도'와 함께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작품인'원더풀 라이프' 역시 재개봉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아래 글은 '걸어도 걸어도'가 8년 전에 첫 개봉할 때 제가 썼던 시네마레터 칼럼입니다. 이전에도 한번 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재개봉도 되었으니 다시 한번 올려드릴게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 등장하는 가족은 평온해 보입니다. 모처럼 아들과 딸이 부모님 댁에 ..
멈춰선/우주 2016. 8. 7. 11:07
오이와 피클. 서천석.
"스탠포드 감옥실험의 짐바르도가 한 이야기가 있다. 오이를 피클통에 넣으면 피클이 된다. 오이가 아무리 피클이 안 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일부 예외가 있지만 상황은 우리 행동에 대해 엄청난 지배력이 있다. 나를 너무 믿지 말고 내가 놓일 조건을 바꿔야 한다. 감옥 실험에서 이틀도 안 되어 악랄한 간수로 변해간 학생들이나 상대적으로 선량한 간수 역할을 했지만 결국 악랄한 간수들을 도운 학생들이나 죄수 역할을 한 학생들이나 모두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아무 문제가 없는 백인 대학생이었다. 그들은 그저 뽑기에 의해 죄수와 간수로 나뉘었을 뿐이다. "나는 신선하고 달짝지근한 오이지, 절대 시고 새콤한 피클이 아니란 말야." 이렇게 외쳐대는 분들이 많아 보인다. 짐바르도의 충고는 이렇다. 날 피클통에 넣지..
멈춰선/우주 2016. 5. 23. 16:40
좋은 어른. [권성민PD의 끼적끼적] 해고무효 대법 확정 판결 소식을 듣고.
스웨덴을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에 앉아있다. 이제야 한숨을 돌리는 기분이다. 하필이면 작업 몇 개가 모여 있는 정신없는 주였다. 거기에 선배가 제안한 전시회도 예정돼 있었는데, 하필이면 외주제작건의 해외출장 일정이 전시 일정과 겹쳐버렸다. 떠나기 전 그나마 겹치지 않은 하루 동안 전시장을 지키러 오면서, 아직 다 마무리 짓지 못한 작업 거리들을 싸들고 앉았다. 그 와중에 연락이 왔다. 대법원 해고무효 최종 승소 판결. 그러니 이 하루 동안 머릿속이 얌전하기란 아주 글러버린 일이었다. 작업은 빨리 해서 보내야 하는데, 전시회장에는 아침부터 감사하게 손님들이 찾아와 주고, 전화기는 대법원 판결 소식으로 계속 울린다. 당장 내일 스웨덴으로 떠날 준비도 전혀 못해놨는데, 어찌어찌 다녀오고 나면 벌여놓은 일들을 정..
멈춰선/우주 2016. 5. 16. 19:50
[왜냐면] 어느 젊은 편집자의 안타까운 죽음.
지난 2월, 한 젊은 편집자가 세상을 떠났다. 근무 중에 사고사를 당한 것이다. 편집자라는 직업 특성상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싶다. 편집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다니. 이렇게 충격적인 사고가 있었는데도, 어쩐 일인지 출판 동네는 조용하다. 그는 참으로 책을 좋아하고, 책 만드는 일을 아주 잘하고 좋아하는, 그야말로 타고난 편집자였다. 그런 그가 죽음을 맞은 것은 서점이었다. 그가 속한 출판사에서 광주에 서점을 오픈하기로 하면서 그 생소한 업무를 맡게 되었고, 오롯이 혼자서 몇 달 동안 그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점 오픈이 다가오자 젊은 미혼 여성의 몸으로 일주일 동안 아예 광주에서 숙식을 하며 일에 매달렸다. 그러다 오픈일을 이틀 앞두고 매장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 사다리에서 떨어져 시멘트 바닥에..
멈춰선/우주 2016. 5. 6. 18:40
내 자리. 이석원.
아무래도 금세 지우게 될 글. 1. 집에서 삼십분 거리인 마트에 걸어가서 빵을 사 가지고 다시 집 앞까지 와서야 아뿔싸, 열쇠가 차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2.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로 내려가 주차장까지 다녀와야 했지만 죽을만큼 귀찮지는 않았다. 3. 마트에서, 순대 파는 아가씨를 오랜만에 보았는데 퇴근을 하는 중이었나보다. 가게 밖에서 본 그녀는 가게 안에 있을때만큼 예쁘지는 않았다. 4. 누구든지 자기 자리에 있을때 사람은 가장 빛이 난다. 어렸을 때 교단에 서서 수업을 할때는 위엄 넘치던 선생님들을 학교 밖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면 왜들 그렇게 초라해 보이던지. 5. 선생님 키가 저렇게 작았구나, 등은 굽고, 어쩐지 나이도 더 들어보이네. 하여간에 교실에서 보이던 포스는 사라진 모습들. 6. 비슷한 ..
멈춰선/우주 2016. 4. 15. 01:06
김영하. 나는 어떻게 장하나 의원의 후원회장이 되었나.
오래 전 우리 부부는 길냥이 두 마리를 데려다 키웠다. 때로는 그런 작은 결정이 인생을 바꾼다. 아내는 그 후로 동물 보호, 더 나아가 동물의 권리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만우절 아침 나는 잠든 아내를 깨우며, “정부가 길냥이를 데려다 키우는 사람에게 보조금을 주기로 했대”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내가 너무 뛸듯이 기뻐하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그런 아내가 어느 날 “장하나 의원이라는 국회의원이 있는데 우리가 그 의원을 후원해야한다”고 선언했다. 아내가 본 기사는 장하나 의원이 대표발의한 이른바 동물원법에 대한 것이었다. 동물의 본성을 무시한 환경 속에서 학대당하는 전시 동물을 위한 법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그때부터 장하나 의원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시멘트 바닥에..
멈춰선/우주 2016. 3. 1. 16:36
정바비. 공익과 성실의 릴레이 끝에는 어찌 된 일인지 황당한 시민이 있다.
1월 한 달 동안 외국에 있었다. 돌아와서 고지서를 챙겨보다 보니 수도요금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수도꼭지를 튼 적이 없는, 그래서 0원이었어야 할 우리 집 1월 수도요금이 그 전달 요금이랑 똑같았다. 오류겠거니 하고 고지서에 적혀있는 다산콜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직원은 '서울시 조례에 의해, 해당월 계량기 검침을 확인 못 하였을시 전월 요금이 부과된다'고 알려주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외국에 있는 동안 검침원과 통화를 하긴 했다. 내가 한동안 못 들어간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그뿐이었다. '그럼 12월 요금으로 부과됩니다'라고 한마디 해줬을 법도 하지만 아니었다. 고지서상에도 '해당 조례에 따라 전월 기준 과금된다'는 문구 따위는 없었다. 분명히 나처럼 장기 부재로 인해 검침을 못 하는 경우들이 있을..
멈춰선/우주 2016. 3. 1. 16:25
'빅쇼트'를 보고. 이동진.
..... 한국의 극영화들은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시스템을 비판하는 이야기에서조차그걸 결국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해버리는 오류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극중 시스템의 수혜자인 가해자들은 인간적으로도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어서체제를 모의할 때든 합의를 종용할 때든 시위를 진압할 때든 철저희 ‘개인적으로’ 악합니다. 반면에 피해자들은 인간미의 화신이며 거의 성자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그럴 때 극에서 다루는 잘못된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그저 싸가지 없고 오만한 개인들의 문제로 축소되어버립니다. 그러니 관객은 자신들과 근본적으로 달라 보이는 그런 악한 캐릭터들을 보며도덕적 우월감 속에서 마음껏 분노를 터트리다가손쉽게 카타르시스를 얻고서 극장을 나선 후 말끔히 잊기 쉽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영화..
멈춰선/우주 2016. 1. 28. 23:36
처신. 이석원.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오해를 사는등의 봉변을 당할때가 있죠. 문제는 이, 사람과 사람간의 일이라는 게 참으로 오묘해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는다고 해서 그런 사고?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말 그렇게 모든 관계를 끊고 숨어버리면 오히려 부풀려진 소문과 추측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걸 어렸을 때는 몰랐죠. 요는 인생이란 건, 아무런 잘못 없이도 잘못을 하게되어버릴 때가 있고, 분명 아무런 가해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가해자가 될 때가 있다는 거에요. 바로 그럴 때, 어느게 오해고 진실인지 나라고 해서 명확히 알 수 있나요? 정말로 나는 아무 잘못이 없고 타인에게 어떤 피해도 준 적이 없다고 믿는 그런 류의 확신은 얼마나 위험하던가요. 오늘도 ..
멈춰선/우주 2016. 1. 8. 00:45
음색. 신재평.
기타소리가 따듯한지 밝은지, 스네어는 가벼운지 두툼한지, 목소리가 까랑까랑한지 부드러운지작업중에는 늘 음색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지만번외로 실제 '색깔'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모니터에 표시되는 각 트랙들의 색을 정할 때 입니다 드럼만 해도 많게는 12트랙이 넘어가니까한 곡에는 수십트랙이 섞이게 되는데얘네를 좀더 쉽게 알아보기 위해서 아마 2집때부터 각 트랙에 색깔을 정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지만처음엔 정말 까다로운 일이었고은근 아직도 가끔씩은 (퍼니쳐에 푸르겔혼이 등장했을때라던지) 작업을 멈추게 하는 복병입니다 나팔 소리가 보라색에 가까운지 아이보리에 가까운지 어디 물어보기도 뭐하니까요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정하면 엄청 신경쓰여서 결국 정신차려보면 색을 고르고 있죠 살..
멈춰선/우주 2015. 12. 14. 03:11
애플의 편지.
#애플의편지. 일의의미. 나의애플은지금이곳. 지금이사람들. 믿습니다아멘.
멈춰선/우주 2015. 12. 10. 13:01
서운함에 대하여...
서운함이 자라면 미움이 된다. 근데 원래 서운함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느끼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과 증오 중간에 별것아닌 점 처럼 숨어있는 서운함을 잘 관리해야한다. 쌓이지않게 자라지않게. 당신에게 자주 서운해하는 사람은 결국 당신을 미워하게 될것이다. -from 여준영
멈춰선/우주 2015. 11. 19. 1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