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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5.07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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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저녁의, 불 밝힌 여인숙처럼 앞으로 10년도]



 인간이란 손님이 머무는 집,

 날마다 손님은 바뀐다네.

 기쁨이 다녀가면 우울과 비참함이, 때로는 짧은 깨달음이 찾아온다네.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다 가도록 환영하라!

 때로 슬픔에 잠긴 자들이 몰려와

 네 집의 물건들을 모두 끌어내 부순다고 해도

 손님들을 극진하게 대하라.

 새로운 기쁨을 위해 빈자리를 마련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어두운 생각, 부끄러운 마음, 사악한 뜻이 찾아오면

 문간까지 웃으며 달려가 집안으로 맞아들여라.

 거기 누가 서 있든 감사하라.

 그 모두는 저 너머의 땅으로 우리를 안내할 손님들이니.

 - 루미, [여인숙] 전문


 여인숙, 그건 따뜻한 불빛처럼 내 기억 속에서 반짝인다. 어렸을 때, 나는 기차역 앞 동네에서 살았다. 당시에는 기차든 버스든 아주 느리게 움직였으므로 먼 지방을 여행하자면 하룻밤 자야만 하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역 주변에는 식당과 아울러 여관과 여인숙이 많았다. 여관은 시설이 좀 더 좋은 반면에 여인숙은 말 그대로 몸만 누일 수 있는 방만 갖춘 곳이 대부분이었다. 여인숙은 가난한 떠돌이들의 숙소였다.

 우리 동네의 골목에는 그런 여인숙들이 즐비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마치 눈을 뜨는 것처럼 여인숙들은 저마다 이름이 붙은 아크릴 간판에 불을 밝혔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고 해도 그 간판에 불이 켜져 있으면 아직 빈방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깊은 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타지에 내린 기차 승객을 상상한다. 하룻밤 묵을 곳을 찾는 그에게 골목을 따라 쭉 늘어선 그 불빛들은 얼마나 반가웠을까?

 골목의 여인숙들은 대개 단층집이었다. 기와를 올린 한옥을 사용하는 곳도 있었지만, 많은 여인숙들은 그저 슬라브 지붕 아래 작은 방들이 일렬로 늘어선 형태였다. 그 방 앞에는 마루가 있었고, 마당에는 수도꼭지와 세숫대야 같은 세면 시설이 있었다. 톱밥을 연료로 온수를 공급하는 목욕탕을 갖춘 여인숙들도 있었지만, 그걸 이용하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대개 제일 안쪽의 방들은 장기 투숙하는 사람들이 이용했다. 방 한 칸에서 여러 가족들이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셋집에 살아도 어차피 방 한 칸에서 온 가족이 다 함께 자던 시절이니까 여인숙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여인숙 주인들은 대개 대문에서 가까운 방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는 공책이 한 권 있었다. 숙박할 손님들은 그 공책에다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적었다. 언젠가 한번은 그런 여인숙에 놀러 갔다가 그 공책을 펼쳐본 일이 있었는데, 낯선 지방의 주소지가 줄줄이 적혀 있었다. 서울과 대구와 부산처럼 내가 잘 아는 도시의 이름도 있었고, 강릉이나 천안처럼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내게 그 지명들은 무척 귀한 낱말들처럼 여겨졌다. 사파이어나 루비 같은, 잡지에 나오는 탄생석들의 이름처럼.

 그런 방에 앉아서 여인숙 주인들은 오늘은 어느 도시에서 어떤 손님이 찾아올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까지 누가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묵하지만 다른 손님들을 배려하는 손님이 찾아와 조용히 하룻밤을 묵은 뒤 처음에 왔을 때처럼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떠날 수도 있겠다. 혹은 술에 만취한 손님이 찾아와 밤새 소란을 피우는 통에 문짝이 부서지고 유리잔이 박살 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상상일 뿐, 어떤 손님들이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오든 그 손님들로 인해서 여인숙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용하게 머물다가 지나가든 밤새 소란을 피우든, 다음 날 아침이면 손님들은 여인숙을 나설 테고, 저녁이 되면 여인숙은 다시 간판에 불을 밝히고 새로운 손님을 기다릴 것이다. 어린 시절, 매일 저녁마다 내가 보았듯이, 여인숙은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눈을 뜰 것이다. 

 루미의 시는 이렇게 묻는다. 오늘 너의 기분은 어땠는지? 마음속으로 어떤 손님이 찾아왔는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잠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지내다가 떠난 고마운 손님이었는지, 이불이 더럽다고 화를 내느라 밤새 잠들지도 못하다가 급기야 집을 부수기 시작했던 난폭한 손님이었는지. 네 마음속으로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는 언제나 너일 뿐, 그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네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를. 그가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기를.

 [청춘의 문장들]이 출간되고 10년이 지나는 동안, 나의 삶에도 수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때로는 조금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랐던 기쁨의 순간이 있었고, 때로는 내게서 빨리 떠나기를 바랐던 슬픔의 나날이 있었다. 어떤 기쁨은 내 생각보다 더 빨리 떠나고, 어떤 슬픔은 더 오래 머물렀지만, 기쁨도 슬픔도 결국에는 모두 지나갔다. 그리고 이젠 알겠다. 그렇게 모든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손님들일 뿐이니, 매일 저녁이면 내 인생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환한 등을 내걸 수 있으리라는 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오든 마다하지 않았으나,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또 일어난 뒤에도 여인숙은 조금도 바뀌지 않듯이.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물고기가 물을 잊는 생활 방법을 취하며

 양이 자기가 짐승 중에서 제일 착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을 버린다.

 오직 눈에 비치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고, 

 귀에 들리는 그대로의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을 가져

 딴 곳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그렇게 내 인생도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리니. 마치 저녁의, 불 밝힌 여인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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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김연수작가이고, 아무리 청춘의 문장들 이어도...

서문부터 이렇게 위로가 되다니요...


여유없고 무심했던 요즈음의 반성.





Posted by _sran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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