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가족. 커트 보니것.
이제 재미있는 이야기로 넘어가자. 성에 관해, 그리고 여성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프로이트는 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여자들은 무엇을 이야기를 하고 싶어할까?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다. 남자들은 무엇을 바라는가? 많은 친구를 바란다. 남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화를 내며 덤비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이상 대가족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신부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신랑 역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두고 멍청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지금은 극소수의 미..
멈춰선/책 2016. 5. 24. 00:04
낙서. 박준.
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 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저는 밥집을 찾다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메뉴를 한참 보다가김치찌개를 시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넣다 말고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넘칩니다 몇 번을 더 버티다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조미료 통을 닫았고요 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저를 계속 보아오던 두 사람도그제야 안심하는 눈빛입니다..
멈춰선/책 2016. 5. 8. 22:05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책머리에 [저녁의, 불 밝힌 여인숙처럼 앞으로 10년도] 인간이란 손님이 머무는 집, 날마다 손님은 바뀐다네. 기쁨이 다녀가면 우울과 비참함이, 때로는 짧은 깨달음이 찾아온다네.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다 가도록 환영하라! 때로 슬픔에 잠긴 자들이 몰려와 네 집의 물건들을 모두 끌어내 부순다고 해도 손님들을 극진하게 대하라. 새로운 기쁨을 위해 빈자리를 마련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어두운 생각, 부끄러운 마음, 사악한 뜻이 찾아오면 문간까지 웃으며 달려가 집안으로 맞아들여라. 거기 누가 서 있든 감사하라. 그 모두는 저 너머의 땅으로 우리를 안내할 손님들이니. - 루미, [여인숙] 전문 여인숙, 그건 따뜻한 불빛처럼 내 기억 속에서 반짝인다. 어렸을 때, 나는 기차역 앞 동네에서..
멈춰선/책 2016. 5. 7. 23:17
동경에 대하여. 오지은.
동경에 대하여. 고등학교 때였나, 동네 햄버거집에서 버거를 먹고 있는데, 당시 인기가 아주 높았던 지누션이 가게에 들어와서 버거를 먹고 갔다. 당연히 분위기는 난리였다. 서울깍쟁이들이라 대놓고 환호를 보내지는 않았어도 모두 볼을 붉히며 사인을 받으려고 하거나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나도 그중 한명이었다. 줄을 서서 사인도 받았던 것 같다. 단지 이동중에 버거가 먹고 싶을 뿐이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누션도 딱하다.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멋있었던 지누션의 모습이 아닌 지누션이 식사를 마치고 문을 나서자마자 급변한 공기였다. 나와 내 집단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누션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야 파운데이션 두꺼운거 봤어? 긁으면 긁히겠더라? 키가 생각보다 작던데? 야 머리 열라 커..
멈춰선/책 2016. 3. 22. 00:55
미스터 무라카미. 오지은.
미스터 무라카미 ...중략... 창작의 영감은 대부분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뇌의 준비운동 시간에 많이 온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시합전에 몸을 푸는 것 같다. 음악의 경우에는 다른 뮤지션의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를 뒤져보거나 할 때, 너무 잘된 것을 만났을 때 자극이 되어 활성화되기도 하고, 오히려 기가 꺾이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별로인 것 앞에선 용기가 솟아올라 호랑이 기운으로 작업에 임하게 되기도 한다. 실제로 별로라기보다 내가 멋대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만. 음악의 경우엔 조금 요령이 있다. 십 년 동안 나라는 선수를 굴리는 방법은 조금은 터득했다. 가끔은 혹독하게. 가끔은 너그럽게. 하지만 하루종일 글을 쓰는 사람으로 지내면서 나는 생초보가 되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냥 열심히 ..
멈춰선/책 2016. 3. 14. 09:01
2015년 5월의 다른 어느 날. 오지은.
2015년 5월의 다른 어느 날 얼마 전 병원에서 한동안 창작을 하지 말라는 진단을 듣고그럴 수는 없다고 진료실에서 언성을 높였다. 인대에 대해서 생각한다. 발목 인대가 늘어나거나 끊어지면 인대가 절대 움직이지 않도록 나무판을 덧대거나 깁스를 한다. 나는 무리를 하면 종종 턱이 빠지는데 병원에서 방법이 없다고했다.그냥 빠지지 않도록 하품을 할 때 조심하고딱딱한 것을 먹지 말라고, 평생.삐지 않도록 잘 잡아주는 강인한 발목 인대빠지지 않도록 잘 잡아주는 강인한 턱 인대-를 노력으로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오만함 또는 어리석음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에도 인대 같은 것이 있다면 아니 뇌에도 지쳐서 자꾸 멈추는 부위가 있다면한동안 거길 사용하지 않고 회복하도록 두는 것이맞을지도 모르겠다. 할 만큼 했다는 마..
멈춰선/책 2016. 3. 8. 23:49
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 이런저런 인터뷰에서 자주 이야기했지만, 는 매우 개인적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전작 의 촬영 때문에 장기간 집을 비웠다가, 한 달 반 만에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밤. 세 살배기 딸은 방 한구석에서 그림책을 읽으며 힐끔힐끔 나를 신경쓰는 기색이었지만, 좀처럼 곁에 오려 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긴장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도리어 나도 긴장이 돼버려서, 둘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흐르는 채 그날 밤이 지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일하러 나서는 나를 현관까지 배웅 나온 딸이 "또 와"라고 한마디 건넸다. 아버지로서 나는 엉겁결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내심 꽤 당황했고 상처를 받았다. 그런가...... 그렇게 농밀하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지만, 나와 함께한 3년이라는 축적된..
멈춰선/책 2016. 1. 2. 23:06
당신이라는 안정제. 김동영, 김병수.
...불안과 우울은 나와 친구가 되는것을 허락하지 않고그저 내 안에 조용히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가 내가 약해지는 순간 사납게 공격을 한다. 우리는 절대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불안과 우울은 규칙도 없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들은 무차별적으로 그리고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규칙이 있다면 미리 대비를 하거나 피하기라도 하겠지만 규칙이 없기에 그저 주어진 운명처럼 모든 걸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불안과 우울은 말이 없다. 아무리 말을 걸고 그것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려 귀를 기울여도 침묵뿐이다. 그것들은 고요하고 사납게 내게 몰아쳤다 올 때처럼 조용히 물러가버린다. 만약 우리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한테 왜 그러는지 물어볼..
멈춰선/책 2015. 12. 14. 01:56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 그는 영원히 '제때'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항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현재에 갇혀 있는게 아니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어떤 곳,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맨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외로움과 공포가 점증해가는 가운데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멈춰선/책 2013. 8. 13. 00:22
따뜻함을 드세요. 오가와 이토.
"마음속으로 오늘로 인생이 끝나버리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찾아올 성가신 감정과 마주하지 않아도 될텐데. 정말로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식탁이었다. 눈 앞의 음식물이 다 없어지고 나니 갑자기 할 일도 없어졌다. 손을 잡고, 새로운 가게를 찾아다니고, 같은 책을 읽고 서로 감상을 얘기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온천탕에 들어가고. 지금까지 당연한 듯이 존재했던 그런 시간들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따로따로 산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멀어질 것이다. 언젠가 몇십 년쯤 지난 뒤에 "그러고 보니 고토라는 여자와 동거했지. 그런데 이제 얼굴도 기억나지 않네"하고 잠시 떠올려주려나. 그때쯤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다고는 ..
멈춰선/책 2013. 6. 16. 01:13
오늘의 약속. 나태주.
오늘의 약속. 나태주.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매미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난 밤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많이 애를 먹었다든지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
멈춰선/책 2013. 4. 5. 18:05
침묵의 미래. 김애란.
-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 이곳 사람들은 '혼자'라는 단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고 또 만졌다. 몸에 좋은 독이라도 먹듯 날마다 조금씩 비관을 맛봤다. 고통과 인내 속에서, 고립과 두려움 안에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소금처럼 하얗게, 하얗게 결정화된 고독...... 너무 쓰고 짠 고독. 그 결정이 하도 고유해 이제는 누군가에게 설명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입을 잘못 떼었다가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감정과 말의 홍수에 휩쓸려 익사당할지도 모르니까. -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 웃는 것, 더 웃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웃는 것. 그리하여 영원히, 절대로, 죽지 ..
멈춰선/책 2013. 2. 15. 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