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일. 김연수

2016.08.07 11:34 from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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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현대 소설의 주인공이 온몸으로 끌어안아야만 하는것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이 불안이다. 만약 [춘향전]처럼 만난 첫날에 사랑가 부르며 여주인공 옷고름 푸는, 참으로 명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원망해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보다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소설은 없다. 설사 그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고 해도 불안 속에서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주인공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에 그런 주인공에게 우리의 마음이 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이 병은 낫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이 불안을 모두 떠안겠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오지 않는 것인지 한번 더 알아보겠다. 이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닐까.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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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가의일.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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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다시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 GV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세번째로 이 작품을 보게 되었는데,

역시나 가슴 속이 꽉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네요. 


최근 1~2달 동안 무려 

세 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가 개봉-재개봉되었는데, 

이 기회에 '걸어도 걸어도'와 함께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작품인

'원더풀 라이프' 역시 재개봉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아래 글은 '걸어도 걸어도'가 8년 전에 

첫 개봉할 때 제가 썼던 시네마레터 칼럼입니다.  

이전에도 한번 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재개봉도 되었으니 다시 한번 올려드릴게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 등장하는 가족은 평온해 보입니다. 모처럼 아들과 딸이 부모님 댁에 찾아와 한 상에 둘러 앉은 채 모두들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즐겁게 먹습니다. 

 

그들이 모인 이유가 십여년 전 바다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고나서 익사한 장남 준페이의 기일을 지키기 위해서임을 관객이 눈치채고 난 후에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선 십여년 전에 잃은 가족 구성원을 떠올리면서 누군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 한 번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잘 극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긴, 벌써 십여년이나 지났으니까요.  자상한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러스한 말투로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넘나들지요. 무뚝뚝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까지 보이구요.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요. 식탁에 둘러앉아 별별 시시한 이야기를 다 꺼내도록 장남에 대해선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 이유가 세월이 어느새 아픔을 치유해줬기 때문일까요.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고통으로 경험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모두는 결국 다른 사람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서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는 존재니까요.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인간의 연약한 삶이 입게 된 숱한 상처들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몸 속 깊은 곳에 잠복해 있던 환부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통증을 되살립니다.

 

 영국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는 “나는 내 가족의 역사를 영화로 만든다. 만일 고통이 없다면 내 영화도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 가수 스팅은 “나는 고통과 혼란에 처해 있을 때 뛰어난 음악을 만들어내는 듯하다”고 회고한 바 있지요.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고 누군가는 음악을 만듭니다. 누군가는 괴로울 때 그런 음악을 듣거나 그런 영화를 보며 펑펑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지만 또 누군가는 그저 입술만 깨뭅니다. 

 

‘걸어도 걸어도’의 아버지는 자신의 장남이 구해낸 아이인 요시오가 별 볼 일 없는 직업을 가진 청년이 된 모습을 보고서 “저런 하찮은 놈 때문에 내 아들이 죽다니. 저런 놈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라고 버럭 역정을 내며 뒷말을 합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요시오에게 친절히 대합니다. 그러나 준페이의 기일마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찾아와야 하는 요시오에 대해 “이제 저 사람은 그만 불러요. 유족인 우리를 보고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불쌍해요”라고 말하는 차남에게, 어머니는 “바로 그래서 부르는 거야”라고 조용히 속내를 드러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초래한 사람에게 그와 같은 방식으로 차갑게 벌을 주고 있었던 거지요. 

 

이 영화의 아버지는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가 죽은 바다로 내려갑니다. 이 영화의 어머니는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가 묻힌 산으로 올라갑니다. 극중에서 바다로 향하는 길과 산으로 향하는 길 모두가 오르막과 내리막이 함께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다로 내려가는 사람이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보다 덜 아파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은밀하게 복수를 하는 이가 직설적으로 욕을 내뱉는 이보다 더 잘 견뎌내고 있다고 할 수도 없지요. 

 

고통을 견디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표출하는 양상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거나 덜 느낀다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그만큼의 약함과 그만큼의 악함으로 악착같이 견딥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from. http://blog.naver.com/lifeisntc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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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baby baby 니 말이 다 맞는 것 같애 

니 옆에서 웃고 있는 여자 정말 예쁜 것 같애 

우린 오랜 시간 서로 잘 맞는다 생각했지만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애 


내가 알던 너의 미소 내 손을 꼭 잡아 주던 너 

이제 그 옆자리는 내가 아냐 

나를 제일 친한 친구라고 소개하는 너를 보면서 

그저 웃음만 짓는 내가 싫어 


예뻐 보여 착해 보여 그래 니 말대로야 

좋아 보여 편해 보여 나와 있을 때보다 

사실 난 좀 아프다 니 앞에선 웃지만 

Baby i'll be Okay. 

할 말은 참 많지만 여기까지 


Baby baby 니 말이 다 맞는 것 같애 

지금 곁에 있는 사람 널 채울 수 없을 것 같애 

너가 없는 하루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널 닮은 사람 찾는 걸 보면 널 못 잊는 것 같애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어 

이 자리에 너를 왜 불렀을까 

바보처럼 널 이제 친한 친구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내가 여전히 너를 찾는 내가 싫어 


예뻐 보여 착해 보여 그래 넌 그대로야 

좋아 보여 편해 보여 내가 있을 때 보다 

사실 난 좀 아프다 니 앞에선 웃지만 

Baby i'll be okay. 할 말은 참 많지만 

넌 괜찮니 안 보이니 바로 니 앞에 내가 

끝난 거니 친군 거니 지금 난 너무 아파 


사실 널 볼 때면 나 아직 흔들리지만 

그래 I’ll say Good Bye 


할 말은 참 많지만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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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주윤하.

2016.07.03 21:25 from record





나 있잖아 사실 말을 더 잘해

왠지 모르게 슬펐던 네 뒷모습 

꼭 안아주고 싶었어 


나 있잖아 사실 너를 좋아해 

아직 이 얘길 못했어 

나 정말 바보 같아 


문득 궁금해져 너와의 사이가 

내 맘을 고백했다면 

우린 어땠을까 


나 익숙해져 너 없는 하루가 

아무렇지도 않게 

오래된 친구들도 만나곤 해 


너 있잖아 사실 내 맘 알잖아 

왜 날 옆에 둔거야 너 나쁜 거 같아 


문득 궁금해져 너와의 사이가 

내 맘을 고백했다면 

우린 어땠을까 


나 익숙해져 너 없는 하루가 

아무렇지도 않게 

네 얘기도 하면서 웃어 


문득 궁금해져 우리의 사이가 

내 맘을 고백했다면 

너는 어땠을까 


나 익숙해져 너 없는 내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아 


너는 지금 어떻게 생각해 

이제는 다 잘 된 거 같아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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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나태주.

2016.07.03 21:15 from record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부엇을 꿈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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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2016.

2016.07.03 21:00 from record









:: 가까운 가족이 죽었다. 죽지 않아야 할 상황이었는데 죽었다. 당시 '황해'가 끝나고 난 뒤였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들더라.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너무 선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세상을 떠났으니깐. 장례식에서 예배를 드리고 스스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서 확장하고 확장했다. 그렇게 찾은 이유를, 시선을 부감으로 와이드해서 봤더니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의 시작은 피해자에 대한 고민부터였다.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답은 있는데 '왜'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답은 없더라. 왜 이 사람이어야만 했는지, 왜 이 피해를 입어야만 했는지. 현실에서는 '어떻게'라는 답에서 충족하는데 '왜'에 대한 질문은 현실 범주에서 생각할 부분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순간 공포가 찾아왔다. 이 영화에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무서운 생각이 든 거다. 인간 존재를 생각하니 가장 밀접한 신이 생각이 났다. 일단 들었던 생각은 이거다. 이 모든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신이 있기는 한 것인가. 실재는 하느냐. 선하긴 한거냐. 바라만 보는 거냐. 도대체 (이 곳은) 왜 이런가. '곡성'은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무명이 종구에게 죄를 지었다고 이야기한다. 그 말이 맞다. 종구가 아닌 다른 시선에서 보면 종구는 멀쩡한 사람을 의심하고 깽판 치고, 죽이려고 하고, 시체 유기까지 하면서 딸 아이를 살리려 죄를 짓는다. 신(무명)은 그 모습을 전부 봤다. 종구는 결국 신을 만났지만 혼란에 빠져 의심을 하고,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혼돈을 겪다 신의 손을 뿌리친다. 엔딩에 보면 무명이 골목길에 오그리고 앉아 있는 그림자가 보인다. 난 그게 현재 신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객이 무명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화가 신에게 질문하고 싶은 내용이겠다. 선과 존재를 증명하고, 바라보지만 말아달라. 인간이 인간다워지게 다시 다가와 달라는. 


:: 종구의 플롯과 일본인의 플롯은 다르다. 이 일본인은 죽임 당한 상태로 유기되는 순간 종구의 플롯에서 사라진다. '곡성'의 공간 자체도 그렇고 영화가 매우 한국적인 플롯 안에서 이뤄져 가는데 일본인은 그렇지 않다. 저는 예수를 모티브로 외지인 캐릭터를 만들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랬듯이, '곡성' 사람들에게 외지인은 세상을 뒤엎을만한 위험한 존재로 성장한다. 신을 믿는다면 다가오는 외지인이 선이라고 믿겠지만,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악이라고 여기는 거다. 외지인이 뭘하려고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구원하려는 것 같다. 종구 플롯에서 벗어나서 보면 외지인은 홀로 묵묵히 뭔가를 하면서 수행하고 기도한다. 외지인이 한 대사를 보면 성경에 나온 예수의 말 뉘앙스와 비슷한 것이 있다. 마지막에 부활한 그가 악마의 형상이 된 이유는 부활한 예수를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에서 착안했다. 그렇다면 이런 형상이어도 되지 않겠나 생각했다. 관객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드리고 싶었다. 과연 이런 상황이 온다면 믿을지, 혹은 믿지 않을지.


:: 이삼이 동굴로 들어가면서 동굴 안과 동굴 밖 세계는 분리되고 서문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관객에게 믿음과 의심에 대한 이야기를 2시간 동안 보여드렸고 그 결과도 보여준 상황에서 나름의 답을 내려야 했다. 진정한 메시아가 악마의 형상을 한 채로 온 것인지, 메시아의 형상을 한 악마를 진짜라고 믿으면서 경배한 것인지 질문을 던진 다음에 관객들에게 선택하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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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다고 생각할 때일수록

혼자이기를,


말하고 싶은 말이 많은 때일수록

말을 삼가기를, 


울고 싶은 생각이 깊을수록

울음을 안으로 곱게 삭이기를,


꿈꾸고 꿈꾸노니-


많은 사람들로부터 빠져나와

키 큰 미루나무 옆에 서 보고

혼자 고개 숙여 산길을 걷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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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Before You. 2016.

2016.06.08 23:33 from record








:: 잠깐만요 빨간드레스 아가씨와 데이트 하고 온 남자로 조금만 더 있을께요..



:: 대담하게 살아요, 끝까지 밀어붙여요, 안주하지 말아요.

줄무늬 스타킹 당당하게 입어요. 

아직 기회가 있다는건 감사한 일이에요. 

그 기회를 줄 수 있어 내 마음도 조금 편해졌어요. 

...

내 생각은 너무 자주 하지 말아요. 

그냥 잘 살아요. 그냥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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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도, 맥주도, 커피도, 물도 아닌. 

우유를 마시며 영화를 보는 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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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guy now. Erlend Øye.

2016.06.08 21:01 from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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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2016.

2016.06.04 16:20 from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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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6월1일 개봉)의 각색은 대담하고 강력하다.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는 연쇄적인 반전들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선택하고도, 첫번째 반전을 제외하면 그 핵심적인 반전 설정들을 모두 버렸다. 후반부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어떤 인물은 사실상 거의 제거하다시피했다. 

그 대신 기발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반전을 만들어 넣으며 중반부 이후 원작과 완전히 다른 길로 내달리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핑거스미스'의 종반에는 "우리가 'xxx'을 속일 수도 있었어. 네가 내게 말만 해주었다면"이라는 대사가 살짝 나오는데, '아가씨'의 과감한 각색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원작과의 비교만으로 이 영화를 판단하지는 마시길. '박쥐'와 '올드보이'가 원작에 대해 그랬듯, 이건 다른 이야기니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히데코(김민희)는 후견인인 이모부(조진웅)의 엄격한 통제 아래 대저택에서 답답한 삶을 살아간다. 사기꾼 백작(하정우)은 상속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히데코에게 접근해 결혼하려고 한다. 백작은 결혼을 좀더 쉽게 성사시키려고 소매치기로 자란 고아 소녀 숙희(김태리)와 짜고 하녀로 위장해 히데코의 시중을 들게 한다. 그러나 히데코와 숙희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모든 계획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가씨'는 한 장면의 의미를 다각도로 곱씹게 하는 스릴러이고, 기이하고도 신선한 유머감각이 지배하는 블랙 코미디이면서, 햇살 가득한 레즈비언 로맨스 드라마이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심플하고 명쾌하다.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게 하는 플롯에 적극 조응하는 김민희의 얼굴은 장면에 따라 서로 놀랍도록 달라서 나른하거나 신비로우며 순수하거나 강인하다. '올드보이'의 강혜정이나 '박쥐'의 김옥빈을 떠올리게 하는 김태리는 확신에 가득 찬 힘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러브 픽션'과 '비스티 보이스'의 사이 어디쯤에 자리잡고 있는 듯한 이 영화의 하정우는 특유의 능청맞고 장난스런 소년 같은 기운으로 납작할 수 있는 배역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내내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인물을 연기하던 조진웅은 극의 말미에서 두고두고 잊기 힘들 연기를 보여준다. 김해숙과 문소리 역시 이름값에 어울리는 연기로 화답한다. 

3부 구성인 이 영화에서 숙희가 이끌어가는 1부는 무척이나 빠른 서술과 많은 대사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같은 상황의 다른 의미가 히데코 시점에서 다시금 다뤄지는 2부를 염두에 둔 화법이다. 그렇게 히데코와 숙희 각각의 시선에서 서로 입체로 붙거나 맴돌듯 미끄러지는 이중나선형 플롯은 심리적 서스펜스와 유머를 곳곳에서 빚어낸다. (일례로 백작이 히데코를 본 순간, "매혹적"이라고 하려다가 말을 바꿔서 "탁, 탁월하게 아름다우십니다"라고 말하는 간단한 장면만 해도 다 보고 나면 다각도로 흥미롭다.) 때로는 날카롭게 돌출되어 있고 때로는 섬세하게 조탁된 대사들은 한국 관객들에게 의미와 소리가 서로 다르게 다가올 일본어와 그 둘이 하나로 인식될 한국어 사이를 넘나들면서 야릇하고도 솔깃한 순간을 끊임없이 자아낸다. 

(군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성애를 다뤘던)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을 떠올리게 하는 일본군 행렬 장면으로 시작하는 '아가씨'는 193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도 관성적으로 민족주의를 채색하지 않는다. 대신 그 시대를 일종의 과도기나 혼종적인 시기로 보아내는데, 세트로 공들여 만든 극중 서재 풍경에서 이런 시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공간에는 조선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던 극중 한 인물의 분열된 욕망이 담겨 있다. 

고전적이고 정교한 촬영과 화려하면서 섬세한 미술-의상-분장은 관객의 눈이 내내 호사를 누리게 하는 한편, 인물에게 덧씌워진 시공간의 굴레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니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두 인물이 환하게 나신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성애 장면들은 성별에 따라 명백히 대조적이다. 연미복과 나비 넥타이로 외피를 두른 극중 남성들의 욕망은 하릴없이 내연하거나 어이없게 빗나간다. 책을 통해 잘못 배운 그들의 뒤틀린 욕구는 점멸하는 조명 아래에서 서로 얽혀 기괴한 참극 속에서 좌초된다. 온전한 즐거움은 오로지 여성들의 것이다. 욕망 앞에서 정직한 히데코와 숙희는 계급을 넘어선 채 서로 동등한 육체로 환하게 섹스한다. 극중 베드신은 이토록 생생한 사랑과 감각 앞에서 감출 게 뭐가 있냐는 듯 하나같이 적나라하면서 시종 밝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골무로 치아를 갈아주는 장면일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시작한 박찬욱 작품세계의 여성성은 '아가씨'에 이르러 만개했다.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에 대한 파격적 각색의 핵심은 바로 '연대'에 놓여 있다. 결국 남성에 의해 제공된 틀과 계획을 거부한 채 둘만의 이야기 속으로 녹아 드는 두 여성은 섹스의 절정에서도 탈주의 정점에서도 굳게 손을 맞잡는다. 그들이 저택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남성이 폭력적으로 강제한 금지의 계율을 뜻하는 뱀 머리 형상을 부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장면을 위해서 원작 소설의 손가락 형상을 영화는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뱀 머리 형상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극이 끝날 무렵 두 연인은 징벌의 수단이었던 구슬을 쾌락의 도구로 바꾸며 떠나온 세계를 조롱한다. 

그들이 저택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이 영화가 햇빛과 달빛에서 실내등까지 빛을 세심하게 통제하고 변주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생의 활력으로 가득 찬 이 여성 성장영화는 빛이 금지된 저택을 벗어나 망망대해에서 두 연인에게 멋진 신세계를 선물한다. 그 라스트 신에서 바다 위 보름달은 처음으로 구름을 완전히 벗어난 채 밝을 빛을 내뿜는다. 그때 그 달은 바로 저택 안에서 히데코와 숙희의 방 사이 문에 그려져 있었던 둘만의 보름달이었다. 

그래, 맞다. '아가씨'는 모두가 좋아할 만한 영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종 킬킬대게 만드는 검은 유머와 흥미롭게 비틀린 회색빛 플롯 사이로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질주하는 붉은 감정은 내내 선연하다. 호쾌하다. 

★★★★


from. 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magazine2.movie.daum.net/movie/36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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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에 본 아가씨는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객석에 불이 켜지고, '하아-'라며 숨을 쉬고 있었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래서 결국 동성애야?'라고 내뱉어 버리는 바람에(단어 자체보다 말투가 더 귀에 걸렸다) 당황했다.

특히 대형극장에서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기도 전에 객석불을 켜버리는게 참 싫다.

헤어질 준비도 되기전에 급하게 헤어지는 기분이랄까.

이번에도 여운을 길게 안지 못해 아쉬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너무 좋았다. 

특히 요즘처럼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훅훅 마음을 파는 시기에 이런 연대영화가 나와주어 이동진평론가의 말처럼 호쾌하다. 



ps. '곡성'을 (여러 이유에서) '아 나는 못보겠구나'라고 포기했는데, 

이동진 평론가가 아가씨에는 별점 4, 곡성에는 별점 5를 주었다. 곡성을 볼 수 있을까. 다시한번 10분정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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