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남진우.
그리하여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낡은 수첩 한 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 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너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 구석에 밀어넣은..
멈춰선/책 2018.11.29 00:27
옛 노트에서. 장석남.
옛 노트에서. 장석남.그때 내 품에서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
멈춰선/책 2018.11.13 23:19
밤. 에피톤프로젝트.
밤에는 싸우지 말자.밤은 늘 낮보다 위험하다.밤에는 대꾸하지 말자. 누군가의 푸념도 그저 들어주자. 밤에는 시비 걸지 말자. 그 사람도 오늘은 꽤 힘든 하루였다.밤에는 소리 내지 말자. 누군가의 웃음도 괜히 미워질 때가 있다. 밤에는 그리워하지 말자.누구라도, 아무에게도 그립다고 말해도,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밤에는 고마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말자.밤에는 기뻐하지도, 또 슬퍼하지도 말자.밤은 밤이다.밤이..
멈춰선/책 2018.11.06 00:40
오해의극복. 최유수.
:: 타인의 생각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모든 관계 속에서 오해를 경험한다. 상처를 입거나 단념하게 되고, 때로는 스스로 고독을 선택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타인의 체계를 인정하고 그 체계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생각이나 감정을 가능한 한 적확하게 짐작하고자 하는 태도. 너와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오해를 불사하겠다는 굳건한 의지. 사랑한다는 말은 그런의지를 내포하고 ..
멈춰선/책 2018.11.05 23:52
계절감. 오은.
계절감.귀퉁이가 좋았다 기대고 있으면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물러갔다 뭔가가 사라진 것 같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낯이 익고 있다 냄새가 익고 있다 가을은 정작 설익었는데 가슴에 영근 것이 있어&nbs..
멈춰선/책 2018.10.12 13:55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 그늘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
멈춰선/책 2017.10.04 21:24
건너편. 김애란.
:: 도화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법을 존중했다. 수사도, 과장도, 왜곡도 없는 사실의 문장을 신뢰했다. ...(중략)...더구나 그 말은 세상에 보탬이 됐다. 선의나 온정에 기댄 나눔이 아닌 기술과 제도로 만든 공공선. 그 과정에 자신도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꼈다. 그것도 서울의 중심 이른바 중앙에서.:: 이수는 자기 근황도 그런 식으로 돌았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
멈춰선/책 2017.07.16 23:57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 하지현.
:: 불확실한 세상은 언제나 나를 불안정하고 흔들리게 만든다. 그 흔들림은 위험신호를 발생시키고, 몸은 긴장하고, 마음은 예민해지고, 전투모드를 지속하다 제풀에 지쳐버린다. 마음의 에너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싱크홀에 빠져서 세상의 절멸을 바라거나 구원의 환상을 꿈꾸고 있다.  이 안에서 개인이 강해질 수 있는 정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제 나 한 사람의 생존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자아를 완벽하게 발달시키겠다는 욕망이 의..
멈춰선/책 2017.04.19 00:38
공감필법. 유시민.
:: 공부가 뭘까요. 인간과 사회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작업입니다.:: 어떤 텍스트를 비판하려면 먼저 그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주장을 하는 경우에도 텍스트를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의 눈으로 그 텍스트를 봐야 합니다. 글쓴이가 무슨 생각과 어떤 감정을 텍스트에 담았는지 살펴본 다음 빠져나와서 자기 자신의 눈으로 그 텍스트를 비평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걸 쓴 사..
멈춰선/책 2017.03.26 18:35
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 인격자, 리더, 세계사의 위인들, 일일드라마의 주인공들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믿고 '난 할 수 있다'며 결의를 다지겠지. 나는 그런 훌륭한 인간이 못 되었으므로 끊임없이 번민했다. 내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내가 옳은 선택을 한 걸까?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마흔이 되어서까지 그런 걸 고민한다는게 이상했다. :: 우선 내 감정이 중요하다. 나는 즐겁게 살고 싶다. 내 인생 3년을 그런 쓸모없는 일에, LPG 가스..
멈춰선/책 2016.10.03 14:18
소설가의일. 김연수
---그러므로 현대 소설의 주인공이 온몸으로 끌어안아야만 하는것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이 불안이다. 만약 [춘향전]처럼 만난 첫날에 사랑가 부르며 여주인공 옷고름 푸는, 참으로 명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원망해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보다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소설은 없다. 설사 그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고 해도 불안 속에..
멈춰선/책 2016.08.07 11:34